
스파이더맨이 총을 들고, 뱀파이어가 목사 사기꾼으로 나오는 영화가 있습니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면서 틀었는데, 2시간 넘는 러닝타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끌려 들어갔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호화 캐스팅 + 느린 전개"라는 조합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인데, 제가 직접 보고 나서 그 평가가 얼마나 맞는지 검증해봤습니다.
화제의 출연진, 기대만큼 보여줬나
일반적으로 스타 배우가 여럿 나오면 "얼굴값 모음집"이 되고 정작 영화는 산만해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 영화는 그 공식을 꽤 깔끔하게 비껴갔습니다.
아빈 역의 톰 홀랜드는 마블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던진 연기를 보여줍니다. 복수심을 품은 청년이지만 분노를 절제하면서 눌러 담는 연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티가딘 목사 역의 로버트 패틴슨은 비열하고 교활한 사기꾼 목사를 연기했는데, 제가 이 영화를 보고 가장 크게 놀란 배우가 바로 그였습니다.
뱀파이어 에드워드 이미지에 갇혀 있던 로버트 패틴슨이 이렇게 더럽고 찌질한 역할을 이렇게까지 잘 소화할 줄은 몰랐습니다. 보안관 보데 역의 세바스찬 스탠, 리노라 역의 엘리자 스캔런까지 튀는 부분 없이 톤을 맞춰서 끌고 가는 앙상블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자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캐스팅만 보면 역대급 라인업인 건 사실입니다. 다만 캐스팅이 워낙 화려하다 보니,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묻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캐릭터마다 분량이 나뉘면서 몇몇 인물은 왜 이 이야기에 있는지 의문이 생기는 대목도 있었습니다.
종교적 광기가 만들어낸 악의 구조
이 영화의 핵심 소재는 종교적 광신주의(religious fanaticism)입니다. 여기서 종교적 광신주의란 신앙을 개인의 욕망과 공포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신의 이름으로 뭐든 용납되는" 세계관인데, 이 영화 속 인물들 대부분이 이 틀 안에 갇혀 있습니다.
50~60년대 미국 남부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인물들의 이야기가 세대를 넘어 얽히며 전개됩니다. 윌러드는 아내의 암을 낫게 해달라며 뒷산 십자가에 기도를 올리고 결국 강아지까지 제물로 바칩니다. 로이는 목숨을 건 퍼포먼스로 헬렌을 사로잡고, 티가딘은 신앙의 언어를 입히고 여자들에게 접근하는 사이코패스입니다. 신앙이 실제로는 각자의 집착과 공포를 포장하는 껍데기로 기능하는 구조가 일관되게 이어집니다.
솔직히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소름 돋았던 부분은 이 악인들이 전혀 자신을 악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다들 나름의 믿음과 명분으로 움직입니다. 출처: IMDb, The Devil All the Time (2020)에 따르면 이 영화는 도덕적으로 고립된 인물군상을 통해 선의의 허상을 그리는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성악설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습니다. 세상에는 부패가 만연해 있고, 아무도 순수한 영웅이 아닙니다. 아빈조차도 결국 또 다른 폭력의 고리를 잇는 형태로 끝납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표현이 이보다 잘 어울리는 영화를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 윌러드: 신앙심에서 출발했지만 자기 가족까지 희생시키는 광기로 귀결
- 로이: 신체를 건 종교적 쇼로 헬렌을 조종, 결국 살인으로 이어짐
- 티가딘: 목사라는 권위를 이용한 착취와 범죄
- 보데: 법의 수호자이지만 자기 보신을 위해 증거를 은폐하는 부패한 보안관
염세적 분위기, 의도된 선택인가 단순한 우울함인가
영화가 전반적으로 굉장히 염세적이고 차갑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분위기는 허무주의적 세계관(nihilistic worldview)을 표현하는 장르 문법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허무주의적 세계관이란 인간의 선의나 노력이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인식을 말하는데, 이 영화는 그 분위기를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유지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이 차가운 톤이 무너지는 순간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인물들의 연기나 연출 역시 과잉되는 지점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고, 잔혹한 장면들도 요란하게 터뜨리지 않고 그냥 조용히 스치듯 지나갑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섬뜩했습니다. 뭔가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잔잔한 수면 아래에 계속 깔려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다만 이 분위기가 약점이 되는 지점도 있었습니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너무 극단적이고 광신도적이거나 폭력적이라서, 감정적으로 이입할 대상이 좀처럼 생기지 않았습니다. 아빈을 응원하고 싶지만, 그 역시 결국 같은 폭력의 문법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기대했다면 다소 허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레이션이 꽤 자주 등장하는데, 관객이 스스로 해석할 여지를 주지 않고 상황을 설명해버리는 방식이 아쉬웠습니다. 분위기를 쌓아놓고 스스로 깨버리는 느낌이랄까요. 출처: Rotten Tomatoes, The Devil All the Time 평론가 평에서도 이 내레이션 과잉에 대한 지적이 여러 차례 나왔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치고는 꽤 공들인 작품, 그런데
이 영화는 도널드 레이 폴록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원작 소설은 미국 남부 고딕(Southern Gothic) 장르의 대표작으로 꼽히는데, 여기서 미국 남부 고딕이란 도덕적 부패와 종교적 위선, 빈곤과 폭력이 공존하는 미국 남부 지역의 어두운 면을 다루는 문학 장르를 말합니다. 플래너리 오코너나 코맥 매카시 계열의 문학적 DNA를 가진 영화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원작 소설의 팬이라면 "이게 그 소설 맞아?" 싶을 만큼 충실하게 옮겼다는 평이 있는데, 저는 원작을 읽지 않은 상태로 봤습니다. 그래서 인물들 간의 연결 고리가 처음엔 다소 산만하게 느껴졌습니다. 소설에서 여러 챕터에 걸쳐 쌓아가는 서사를 2시간짜리 영화로 압축하다 보니, 몇몇 이야기는 왜 여기에 있는지 이유가 희미하게 느껴졌습니다.
스토리텔링 측면에서 솔직히 평가하자면, 이야기의 실타래들을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는 있는데 그 매듭이 단단하지 않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칼 부부의 연쇄살인 파트는 특히 그랬는데, 본류 이야기와 연결되는 맥락이 약해서 따로 떼어낸 단편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전개가 느린 편이라 배속 재생을 살짝 권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영화를 "봐도 된다"고 말하는 이유는, 완성도가 어중간한 작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들인 티가 납니다. 배우들도 진지하게 임했고, 시대적 배경 묘사도 세밀합니다. 엄청난 임팩트를 남기는 영화는 아니지만, 보고 나서 한동안 머릿속에 남는 무게감이 있는 작품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으로,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2020년 공개 당시부터 넷플릭스 독점 배급이었기 때문에 다른 플랫폼에서는 확인이 어렵습니다. 구독 중이라면 바로 검색해서 볼 수 있습니다.
Q. 로버트 패틴슨이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가요?
A. 주인공은 톰 홀랜드가 연기한 아빈입니다. 로버트 패틴슨은 티가딘 목사라는 조연 역할로 등장하는데, 분량 대비 존재감이 워낙 강렬해서 주인공처럼 기억에 남습니다. 일반적으로 조연은 묻힌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Q. 폭력 수위가 높은 편인가요?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A. 폭력적인 장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고어 장르처럼 자극적으로 연출하지 않고 조용하고 건조하게 처리하는 방식이라 의외로 감각적 충격은 크지 않았습니다. 스플래터 영화 수준을 기대하거나 걱정하는 분이라면, 그보다는 심리적 불쾌감 쪽이 더 크다고 보시면 됩니다.
Q. 원작 소설을 읽고 봐야 더 재밌나요?
A. 저는 원작 없이 봤는데도 충분히 내용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인물들 사이의 연결이 다소 느슨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원작을 읽으면 더 촘촘하게 이해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원작을 꼭 먼저 읽어야 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읽고 보면 더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결론
정리하면,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역대급 걸작이냐"는 질문에는 선뜻 답하기 어렵지만, "공들인 작품이냐"는 질문에는 확실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느린 전개와 내레이션 과잉이라는 단점이 있고, 감정 이입할 캐릭터가 없다는 허탈함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남부 고딕 장르 특유의 묵직한 분위기와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 그리고 종교와 폭력과 세습되는 악이라는 주제 의식은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분께 추천합니다.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 변신이 궁금하거나, 선의가 얼마나 쉽게 악으로 뒤틀릴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한 번 볼 만한 작품입니다. 단, 밝고 경쾌한 스릴러를 기대하고 틀면 당황할 수 있으니 마음의 준비는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