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닥터 스트레인지2를 보고 기억에 남은 건 스트레인지가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이 영화가 '생각보다 별로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을 안고 극장에 들어갔습니다. 샘 레이미 감독이 공포 연출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말을 듣고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이었습니다. 막상 보고 나니 충분히 재미있었는데, 동시에 할 말도 정말 많았습니다. 스포일러가 많으니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완다비전 안 보면 절반은 놓친다 — 사전 맥락의 함정
영화는 시작부터 아메리카 차베즈라는 신규 캐릭터와 멀티버스(Multiverse), 즉 동시에 존재하는 수많은 평행 우주 개념을 빠르게 밀어붙입니다. 여기서 멀티버스란 하나의 선택이나 사건마다 서로 다른 결과로 분기된 우주들이 병렬로 공존한다는 설정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가 페이즈 4부터 본격적으로 도입한 세계관의 핵심 축입니다.
문제는 이 영화의 진짜 빌런이 완다 막시모프, 스칼렛 위치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왜 그토록 집착하는지, 아이들은 대체 누구인지를 이해하려면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완다비전>을 먼저 봐야 합니다. 제가 유튜브 요약 영상을 미리 챙겨봐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완다의 심리를 절반도 따라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건 개인 취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MCU가 페이즈 4로 넘어오면서 영화 한 편에 담지 못하는 서사를 OTT 드라마로 분산시키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마블 스튜디오는 페이즈 4 이후 영화와 드라마를 연동하는 방식을 공식 전략으로 채택했다고 밝혔습니다(출처: Marvel 공식 홈페이지). 반가운 확장이기도 하지만, 구독료와 시청 시간이라는 진입 장벽이 생기는 셈이라 마냥 좋다고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 사전 필수 시청: 디즈니플러스 <완다비전> — 완다의 동기와 아이들의 존재 이해
- 권장 시청: 디즈니플러스 <로키> — 멀티버스 분기 원리 이해
- 선택 시청: 디즈니플러스 <왓 이프...?> — 평행 우주 개념 친숙해지기
공포 연출이라더니 — 샘 레이미 감독의 명암
저는 공포 영화를 꽤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샘 레이미 감독이 MCU에 합류한다는 소식에 기대가 유독 컸습니다. 레이미 감독은 <이블 데드> 시리즈로 공포 장르의 교과서라 불리는 인물이니까요(출처: IMDb — Sam Raimi 감독 필모그래피).
실제로 영화에는 그의 색채가 곳곳에 배어 있었습니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붉은 조명, 어두운 안개 필터, 디졸브(dissolve) 기법의 빈번한 사용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디졸브란 한 화면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동시에 다음 화면이 점진적으로 나타나는 장면 전환 기법으로, 고전 호러 영화에서 긴장감이나 환각 효과를 줄 때 자주 사용됩니다. 영화 초반 간토스와의 전투 장면에서 레이미 특유의 눈을 못 떼게 만드는 비주얼이 나올 때는 '아, 이게 바로 이 감독 손맛이구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공포 영화'라는 수식어 치고는 제가 느낀 심리적 공포는 생각보다 얕았습니다. 스칼렛 위치의 특기가 정신 조종, 즉 마인드 컨트롤인 만큼 저는 심리적 공포가 서서히 축적되는 방향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런 연출은 프로페서 X 장면 정도에 그쳤고, 그마저도 더 밀어붙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한편으로 잔인한 장면 일부는 어른 기준으로는 자극이 약했지만 12세 관람가 기준에서는 꽤 과감한 시도였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음표 마법 시퀀스에 대해 '유치하다'는 의견도 있는데, 저는 아이디어 자체는 괜찮았다고 봅니다. 음악으로 주문을 상쇄하는 발상은 신선했고, 마블의 드라마 <리전> 속 볼레로 전투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다만 색감 조합이 문제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주황과 보라의 대비가 긴장감보다는 동화 느낌을 줬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멀티버스가 히어로의 죽음을 가볍게 만드는 건 아닐까
영화에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한 대목은 사실 엘리자베스 올슨의 연기였습니다. 섬찟한 마녀와 상처 입은 어머니를 넘나드는 표현이 너무 설득력 있어서, 빌런임을 알면서도 계속 그녀의 편을 들고 싶어졌습니다. "당신이 규칙을 깨면 영웅이 되고, 내가 그러면 적이 돼"라는 대사가 예고편에서부터 머릿속에 박혔던 이유도 그 목소리와 바이브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완다가 일루미나티를 무너뜨리는 장면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일루미나티(Illuminati)란 이 영화 속 838 세계를 관장하는 최강의 히어로 집단으로, 블랙볼트, 리드 리처즈, 캡틴 카터, 캡틴 마블, 프로페서 X 등으로 구성된 드림팀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완다에게 제압되는 데 걸린 시간이 대략 몇 분에 불과했습니다. 캐릭터 강도 면에서 논란이 없지 않은 처리 방식이지만, 완다의 위협을 각인시키기 위한 연출로 이해할 수는 있었습니다.
더 근본적인 고민이 있었습니다. 멀티버스가 개입된 순간부터, 마블이 마음만 먹으면 다른 차원의 어떤 캐릭터든 불러올 수 있게 됐다는 뜻이 됩니다. 아메리카 차베즈의 능력, 즉 스타 포털(Star Portal)을 통해 임의의 우주로 이동하는 능력은 그야말로 서사적 치트키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누군가 희생을 하더라도 '다른 차원에서 불러오면 그만'이라는 인식이 생기지 않을까요? 저는 이 지점이 멀티버스 확장의 가장 큰 리스크라고 봅니다. 히어로의 죽음이 주는 무게감, 즉 내러티브 웨이트(Narrative Weight)가 희석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다크홀드(Darkhold)를 이용한 시체 드림 워킹(Dream Walking) 장면은 제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드림 워킹이란 자신의 의식을 다른 차원에 있는 자신의 육체에 빙의시키는 흑마법으로, 다크홀드를 매개로 가능해집니다. 시체를 매개로 이 능력을 쓰는 장면은 레이미 감독의 공포 연출이 가장 강렬하게 터진 순간이었고, 흑마법을 동등하게 사용했을 때 스트레인지가 완다에 필적하거나 능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줬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완다비전 안 보고 닥터 스트레인지2 봐도 되나요?
A. 볼 수는 있지만, 완다의 행동 동기와 아이들이 왜 등장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유튜브 요약 영상으로 사전 파악을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크게 도움이 됐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완다비전> 본편을 먼저 보시는 쪽이 훨씬 몰입도가 높습니다.
Q. 닥터 스트레인지2는 진짜 공포 영화인가요?
A. 공포 영화적 연출 요소는 분명히 있습니다. 샘 레이미 감독 특유의 붉은 조명, 어두운 필터, 고전 호러 장면 전환 기법인 디졸브가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다만 심리적 공포가 서서히 쌓이는 방식은 아니었고, 성인 공포 팬 입장에서는 체감 강도가 기대보다 낮을 수 있습니다.
Q. 일루미나티가 그렇게 빨리 지는 게 설정상 말이 되나요?
A.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특히 838 세계 캡틴 마블이 동상에 깔려 그대로 사망하는 장면은 캐릭터 강도와 비교해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스칼렛 위치의 압도적인 위협을 빠르게 각인시키기 위한 연출상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런 부분까지 따지면 영화 속 서사가 진행되기 어렵다는 것도 현실입니다.
Q. 다크홀드가 영화에서 파괴됐는데, 앞으로 MCU에 다시 등장할까요?
A. 완다가 모든 차원의 다크홀드를 파괴했다고 나오지만, 멀티버스 구조상 또 다른 형태나 차원의 다크홀드가 등장할 가능성이 완전히 닫힌 건 아닙니다. 흑마법을 사용했을 때의 닥터 스트레인지가 얼마나 강력해지는지를 보여준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만큼, 이후 페이즈에서 관련 복선이 이어질지 지켜볼 만합니다.
결론
아쉬운 점을 길게 썼는데, 그 이유가 재미없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잘 만들 수 있었을 것 같아서입니다. 엘리자베스 올슨의 연기, 시체 드림 워킹 시퀀스, 838 세계를 스쳐 지나가는 멀티버스 비주얼은 극장에서 볼 가치가 충분했습니다.
다만 멀티버스가 MCU의 핵심 축이 될수록, 히어로 서사의 무게감이 어떻게 유지될지가 앞으로 마블이 풀어야 할 진짜 숙제로 보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난 뒤부터, 마블 신작을 보기 전에 관련 드라마 요약 영상을 반드시 챙기는 루틴이 생겼습니다. 처음 극장 들어갈 때의 두려움이 결국 나쁘지 않은 습관 하나를 만들어줬으니,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제게 충분히 의미 있었습니다.